말과 행동의 정치적 분열증을 넘어(남재일,르몽드...)
2009/11/19 10:35

인터넷에선 진보, 직장 가면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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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남한에서 우와 좌의 대립의 경험적 역사는 ‘우의 이념=생존을 위한 전략’, ‘좌의 이념= 정치적 이념에의 헌신’으로 의식화됐다. 물론 여기서 ‘좌’는 북한 체제를 정치적 신념으로 삼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냉전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한 반공국가인 한국 사회에서 ‘좌’는 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항하는 정치적 타자를 총칭하는 범주였다. 남파 간첩부터 시장경제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자와 정부 시책을 우의 관점에서 맹렬히 비판하는 자 등이 광범위하게 이 범주에 포함돼왔다. 이 범주를 발명한 정치적 주체인 ‘우’는 물질적 탐욕을 정치적 결의로 포장하는 자부터 도덕적 파탄을 정치적 열정으로 위장하는 자들이 중심이 되고, 좌회전을 하면 필시 신호위반에 걸린다는 사실을 숙지한 다수의 군중이 뒤를 따랐다. 덕분에 한국 사회에서 ‘좌’란 범주는 줄 서면 밥 먹기 어려운, 그러나 줄 서는 자들은 결기 있는 자들이란 범주로, ‘우’의 범주는 별 소신이 없으면 밥 먹기 위해 자동으로 가는 회사 근처 식당 같은 이미지로 각인됐다. 정치와 도덕의 분열이 내면에 구조화돼서, 정치적으로 이기려면 비도덕적이 돼야 한다는 생존 전략은 현재에도 유용한 처세의 공리로 군림하고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에 국민은 감동을 먹고 희망을 보았지만, 결국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탄식만 남았다. ‘지못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을 쳐다보면서 경제적으로 짭짤한 곳에 뿌리내린 자들, 인터넷에선 진보, 술자리에선 중도, 직장 가면 보수가 되는 자들의 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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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의 세가지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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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권력 중심부에 숟가락을 올려놓는 몇몇 인사들의 행보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적 탐욕으로 보지만, 진보 진영 자체의 변화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진보 진영의 변화가 보수가 권력을 얻는 방식의 효율성을 모방해 ‘국가주의’를 진보가 활용하자는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한 접근 방식은 권력의 주체인 시민을 도구화할 뿐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상흔을 자극해서 가장 열등한 힘을 불러모아 권력을 창출하기 때문에 보수 지배의 담당자만 바꿔놓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한 도그마 뒤에 숨은 가면의 폭력

좀 엉뚱한 얘기지만 나는 한국 사회가 실질적으로 민주화되려면 매국노 이완용이 구한말의 시민단체라 할 독립협회의 중심 인물이었다는 점(이완용은 독립협회 존속 기간 3분의 2 이상을 위원장, 회장,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우두머리인 이용구가 동학혁명 때 농민군 지휘자였다는 점(친일로 변절한 것은 정부의 동학당 탄압에 보호처를 찾기 위해서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을사조약 당시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장지연이 나중에 친일을 했다는 점, 안중근도 나중에는 일본의 아시아 연대론이 허구임을 깨닫긴 했지만 러일전쟁 당시에는 “황인종 전체를 위한 의로운 싸움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던 점을 기억하는 인간이 많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와 도덕을 동시에 상상하는 정치적 개인이 많아져야 승리한 도그마의 등 뒤에 숨어서 가면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나운 노예 근성이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야 ‘몸은 보수-입은 진보’, ‘생산은 보수-소비는 진보’, ‘광장에서는 진보-밀실에서는 보수’로 분열된 정치적 분열증이 개선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진정으로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지식인 몇몇이 보수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이 몸까지는 진보로 전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사원문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48

세상은 나를 이해시키지도 또 내가 이해한데로 돌아가지 않는다.
단지 그런 말도 안되는 세상을 열심히 이해 하면 된다.

2009/11/19 10:35 2009/11/1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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